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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의 그날, 하얼빈 저격 사건. 대한민국의 원수, 이토는 왜 하얼빈에 왔나?

by 교앵쓰 2021. 2. 18.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 일본의 총리,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범인은 암살 직후 곧바로 잡혔죠. 조선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이었습니다.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자원한 우덕순, 유동하 등 7명은 처음에는

중국의 하얼빈 역

'동청철도'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 '관성자 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역', 그리고 '채가구 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습니다.

 

그러나 채가구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취소되었죠.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경비병의 경호를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는 군중들 앞을 지나가는 순간,

계획대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는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죠..!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토 히로부미는 왜 하얼빈 역에 온 것일까요?


1905년 가을, 러일 전쟁이 종결됩니다.

러시아와 일본 간 벌어진 이 전쟁은 두 나라의 한반도 주도권을 놓고 벌여졌는데요. (왜 남의 땅을 지들끼리..)

러시아 지도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죠. 

 

1909년 일본 정부는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당시 정세를 이용하여,

 

일본의 조선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와 러시아의 총리 코콥초프가 만나 

한반도와 중국 둥베이 지방의 일본과 러시아 영향권 구분을 의논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출발하였죠.

 

코콥초프 러시아 총리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정각에,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자 러시아 총리 코콥초프가 차에 올라 맞이하였습니다.

 

약 20분 후 이토 히로부미는 코콥초프와 동행하면서 자신을 환영하는 환영 행렬을 검토하기 시작했죠.

 

9시 30분,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의장대 앞으로 걸어갔고, 

안중근 의사는 안중근 의사로부터 10걸음 정도 떨어진 이토 히로부미를 러시아 군인 틈을 타 의장대를 뚫고,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권총을 꺼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을 발사했죠..!

이토 히로부미

총알 세 발이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복부에 맞춰졌고,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있던 의사가 재빨리 이토 히로부미를 차에 태워 응급 처치를 하였지만,

20분 후,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하게 되었죠.

 

안중근은 혹시 자신이 쏜 남자가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 것을 대비해 다시 3발로 이토 주위의 수행비서관인 모리 다이지로,

하얼빈 주제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그리고 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를 쏘았으며,

일본군 장교 1명이 안중근을 죽이려들자 그를 사살했죠.

 

코콥초프 러시아 총리는 눈앞에서 일어난 사고에 당황하지 않고 쓰러진 이토를 부축했으며 이토는 그의 품에 쓰러졌습니다.

이토의 수행원인 무로다, 나카무라 등도 다급하게 이토를 껴안아 보호했고,

 

 이때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됩니다.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꼬레아 우라 대한 독립 만세!' 를 두어 차례 외친 뒤 러시아 헌병에게 잡혔습니다.

 

이토는 "당했다"라고 한마디 하였다고 하죠. 

 

수행원들은 우선 이토를 차내로 옮기고 이토가 좋아하는 술을 한잔 따라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했듯 그는 결국 사망했죠.


 

이토 히로부미가 피살된 이후,

일본에서는 하얼빈 역,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에 구리로 표지를 설치했고,

위에는 “이토가 죽은 장소”란 글을 새겼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

또한 제1 승강장 대합실의 벽에는 이토 히로부미 흉상이 세웠죠.

 

그러나 이 기념물은 세계 2차 대전 일본의 항복 후 모두 철거됩니다. 2013년 박근혜 전 대한민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의 주석 시진핑에게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비 건립 희망을 제안했고,

 

중국은 하얼빈 시 인민정부와 하얼빈 철로국에게 하얼빈 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렸죠.

중국은 이 밖에도 하얼빈 역 승강장에 "安重根擊斃伊藤博文事件發生地,1909.10.26.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사살 사건 발생지, 1909.10.26"라는 문구를 새겨놓았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피로 쓴 대한독립

2014년 1월 19일, 중국 측이 건립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하얼빈 역에서 정식으로 개장했죠.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지배 하에 있던 만주 뤼순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아 사형을, 함께 거사했던 우덕순은 3년 형, 유동하 등은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거사를 배후에서 도운 한국계 러시아 갑부인 교포 최재형이 러시아인 변호사를 준비시켰으나 일본은 러시아인 변호사의 변호를 금지했죠.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러시아 경찰에게 교수형을 당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란 인물은 꽤나 비극적인 마지막을 맞이했는데요.

 

같은 사람으로서 그의 삶에 대해 비난 할 자격은 없지만, 한국과, 중국에게 있어서 그는 국가와 민족의 적이었고 처단해할 할 대상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악인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고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겁니다.

뤼순 감옥 수감 중 당시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과 중국에게 '악인'으로 기억되며 반대로 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양국에게 '영웅'으로 불리죠.

 

이와 대조해서 일본에선 이토 히로부미는 '영웅'이라고 불리며 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는 '범죄자'라고 인식됩니다.

 

이 같은 차이는 단순히 자국민을 옹호하는 시선 떄문이 아닌,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이 달라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역사란 단순히 '지나간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고 바뀔 수 있다면

역사는 오히려 '선생님'이라는 칭호가 더 잘 어울리는 녀석일지도 모르겠네요.

 

출처:

ko.wikipedia.org/wiki/%EC%9D%B4%ED%86%A0_%ED%9E%88%EB%A1%9C%EB%B6%80%EB%AF%B8_%EC%A0%80%EA%B2%A9_%EC%82%AC%EA%B1%B4#cite_note-1

ko.wikipedia.org/wiki/%ED%95%98%EC%96%BC%EB%B9%88_%EC%97%AD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6205705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1298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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